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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기

베트남,캄보디아 여행기

by 최영호 2013. 12. 4.


베트남(Vietam) 캄보디아(Cambodia) 여행기

2월3일 (1일)
2003년 2월 3일부터 2월 7일까지 5일간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답사하였다.
2월3일 11:45 베트남항공 939편으로 인천공항을 출발 5시간 비행하여 베트남 호치민 탄손 누트 국제공항에 15:35 도착하였다. 시차는 한국시간 보다 2시간 늦는다. 우리들은 통과여객으로 17:30 캄보디아 씨엠립으로 가는 베트남항공을 다시 갈아타고 18:30 캄보디아 씨엠립 공항에 도착 공항에서 입국 비자를 발급받아 통과하여 20:30 압셀라 앙코르 호텔에 투숙하였다.

2월4일 (2일)
캄보디아(Cambodia)

07:30 호텔에서 나와 캄보디아 앙코르유적지 답사 길에 나섰다. 우선 캄보디아 나라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캄보디아 왕국은 1953년 독립 후 국명을 바꾸었으나, 현재는 독립당시의 국명인 캄보디아 왕국(Kingdom of Cambodia)를 사용하고 있으며, 면적은 181,035㎢(남한의 1.8배)이고, 입헌군주제로서 국가를 상징하는 왕(왕립 왕권 위원회 선출)이 있지만 실권은 없고 수상이 정부를 이끌고 있다.
수도는 '프놈펜(인구 110만명)'이고, 총인구는 1천1백만 명으로 여자65%, 남자 35%의 분포이다. 인종은 90%가 크메르인이고 10%는 중국계, 베트남계 등이다. 언어는 크메르어이고, 기온은 '우기는 5월-10월이고, 평균기온 30도로서 하루에 한번씩 비(스콜)가 온다. 건기는 11월-4월이고, 평균기온 27도, 2월-4월은 35도정도로 무척 더운 나라이다.
북으로 라오스, 동에는 베트남, 서로는 태국이 인접 해 있고, 종교는 90%가 소승 불교이며, 문화는 흰두교에 바탕을 둔 불교신앙에서 유교적 생활양식, 보수적,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해 있다.
산업은 인구의 8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교통수단은 오토바이 택시, 시클로, 자전거가 대종을 이루며, 식수가 나빠 미네랄 워터를 사용해야 한다. 캄보디아에는 유일하게 프놈펜대학 하나가 있으며 GNP는 300달러 수준으로 낮아 우리나라 60년대 정도로 느꼈다.
앙코르 왕국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중앙에 근거를 두고, 790년-1432년까지 번성했다. 전성기 때는 지금의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베트남, 그리고 인도양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한 대제국이었고, 앙코르 일대에는 인구 100만의 당시에는 세계대의 도시가 있었고, 수많은 노예도 있었다고 한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앙코르왓'이 바로 이 시대에 만들어진 찬란한 힌두문화의 결정체지만, 앙코르 왕국은 자야바르만 7세의 과중한 토목공사와 집권층의 부패로 점차 극력이 쇠퇴 하였고, 태국의 아유타족에 의해 1431년에 앙코르가 함락되었다. 이 때문에 앙코르 왕국은 앙코르지역을 포기하고 수도를 프놈펜으로 옮겼다.
13-14세기에는 동쪽에 있는 베트남과 서쪽에 있는 태국이 강해지면서 캄보디아는 1431년에는 수도 앙코르마저 포기하였고, 그 뒤 가까스로 나라를 존속하였다. 그러나1863년에는 프랑스의 보호국이었고, 1887년은 프랑스의 식민지, 제2차대전 중에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1954년 제네바 선언에 의해 월남이 프랑스로부터 독립됨에 따라 캄보디아는 어부지리로 독립된 나라로 30여 년간 내전을 불식시키고 1993년 현 시하 누크를 국왕으로 하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여 관광입국으로 발 돋음 하고 있는 나라이다. 씨엠립(Siem Reap)은 앙코르 왕국의 근거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곳이다. 씨엠(Siem)은 태국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60㎞에 이르는 지역 내에 모두 9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는 100개의 사원이 발견되어 앙코르 유적이 복원되면서 관광 숙박시설 및 각종 편의시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앙코르 톰(Angor Thom)


우리들은 거대한 얼굴이 새겨진 앙코르톰의 남쪽 정문 앞에서 내려 답사를 하였다.
호텔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앙코르 톰은 크메르 왕조의 마지막 도읍지로 나라의 통치를 위한 건축물들과 승려, 벼슬아치, 무인 등의 거주지역을 포함하는 방어 위주의 성이다. 그 당시에는 100만 명 주민이 앙코르 톰 안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한쪽 성벽의 길이가 3km인 정 사각형의 홍토와 사암으로 둘러싸인 성이다. 성벽의 높이는 8m이고 사방에 약 20m 정도의 해자가 성벽 외각에 있다. 이 성의 남쪽 문이 현재 해손이 적으며 앙코르 톰 안으로 들어가면 바이욘, 바푸온, 코끼리테라스, 문둥왕 테라스등의 건축물등이 있다.
앙코르톰은 자야바르만 7세(1181-1201년)가 세운 도시로서 '위대한 도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상부 동서남북 4면에 관음보살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자야바르만 7세가 자기 얼굴을 그렸다는 설도 있다. 성벽은 황토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쌓았으며, 부조의 돌은 사암(모래바위)을 45km나 떨어진 곳에서 공수해 왔다한다. 사암을 쌓은 사이에는 식물성 접착제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틈이 전혀 없고 견고하기 그지없다. 지금도 식물성 접착제의 비밀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해자에 걸쳐진 다리 난간은 신화를 주제로 54명의 선신과 54명의 악신들이 머리 일곱 달린 뱀인 '니가'(뱀신)를 붙잡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의 108 번뇌를 의미한다고 한다. 문 쪽으로 다가서자 미소를 띤 관음보살의 얼굴이 머리를 압도한다.
기념촬영을 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1km쯤 가서 내리니, 거대한 사원이 눈앞에 다가온다.

바이욘 사원(Bayon Temple)

바이욘 사원은 앙코르 톰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입구 좌우에는 남. 여 신이 조각되어 있고,
힌두교사원과 불교사원이 합성됐다고 한다. '스펑 나무가 있고, 바닥에는 사암이 깔려있는데, 조그만 구멍이 나 있는 것은 코끼리가 운반할 도구를 끼운 것이라 한다, 멀리서 보기에는 무질서한 돌무더기쯤으로 생각했었는데, 1층에 들어서자 벽면에 엄청난 조각들로 가득 찬 사원임을 알 수 있었다.
외벽에 부조들이 새겨져 있고, 이 외벽의 길이는 1.2km에 달하고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1만1천명을 넘는다고 한다. 참족들의 침공과 전쟁, 크메르인들의 일상생활 등 부조내용이 다양하고, 그 묘사의 정교함이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하였다.
사원내부에는 부처상이 새겨진 작은 조각이 안치되어 있기도 했고, 과거 스님이 돗자리를 깔고 수도하면서 하루에 1식만 먹었다는 수도하는 장소도 있었는데, 수도 장 소 위 에는 반듯이 탑이 있었다.
탑의 최 상층부는 반듯이 연꽃조각, 난간은 뱀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또, 사원마다 반듯이 한군데의 탑 속에는 공명(共鳴/ 울리는 현상)의 과학적인 원리를 이용하여 징을 쳐서 예불시간과 사원내의 연락사항을 알렸다고 한다.
3층에 오르면 온화한 얼굴에 미소를 띤 거대한 관음보살의 얼굴들이 54개가 있는데 이것은 왕 자신의 얼굴과 미륵불의 얼굴을 합성하여 4면 큰 머리를 한 얼굴 탑을 만든 것이라는 설이 있다고 한다. 숲과 어 울어진 바이욘 상은 정말 장관이었다.



바푸온 사원(Baphuon Temple)

바푸온 사원은 앙코르의 대부분의 사원들이 그렇듯이 메두산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사원은 앙코르 톰이 건설되기 이전 당시 존재하였던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2층에 와불이 있었다는 설명이 나와 있는데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확인해 볼 수 가 없었다. 다만 주위를 한바퀴 돌아보니 상당히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코끼리 테라스(Elephants Terrace)

코끼리테라스라는 이름은 길이 350m의 테라스에 코끼리 행렬이 부조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지만 가루다(힌두교에서 나오는 불사조)와 사자들도 부조되어 있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코끼리가 만세를 부르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앙코르 톰 내부의 왕궁과 마주보고 있으며 12세기말 또는 13세기 초에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축조된 불교사원이다. 300m 길이로 바푸온 사원과 문둥이 왕의 테라스까지 뻗어있으며 윗부분은 원래 나무로 지여져 지금은 사라지고 없으나 증축 및 재건축한 흔적이 있다.
많은 코끼리 부조가 벽에 새겨져 있는데 코끼리와 호랑이의 결투 장면이 생생하게 부조되어 있으며. 테라스 앞에는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는데, 그 옛날 번성했던 시절에 이곳에서 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광장의 앞쪽 끝에는 12개의 탑이 열병하듯이 서 있는데, 파수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문둥이 왕의 테라스(Leper King Terrace)

문둥이왕의 테라스라는 이름은 자야바르만 7세와 또 한명의 왕이 문둥이였다는 소문에 근거한다.
이조각의 머리는 잘려져 있었는데, 실물은 프놈펜국립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문둥이왕의 테라스 아래에는 좁은 길이 있는데 벽면은 다섯 개, 또는 그 이상 층으로 나뉘어져 정교하고 세밀한 부조들이 새겨져 있다. 압사라, 검을 든 왕과 진주로 몸치장을 한 공주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조들이 새겨져 있다.
Leper King은 그의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데 특이한 것은 옷을 입지 않고 있고, 남성의 심벌이 없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한 승려가 왕 앞에서 엎드리기를 거부하자 왕이 칼을 던져 그를 죽였는데, 그의 피가 튀어 왕이 문둥병에 걸렸다고 한다.



타프롬 사원(Ta Prohm Temple)

타프롬 사원은 1186년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지어졌으며 그의 어머니 에게 봉헌된 불교사원이다.
이 사원은 가로 600m 세로 1000m 로서 앙코르 사원 중에 가장 큰 규모이다. 당시 3,140여개의 마을을 통치하였으며, 72,200명의 주민, 18명의 고승, 2470명의 승려와 615명의 무희가 살았다고 한다.
그 재산도 엄청나서 금500Kg, 35개의 다이아몬드, 4,000개의 진주 등 귀금속이 보관되어 있었고 추모행사에는 166,000여개의 촛불이 쓰여 졌고 8만명의 노역자가 종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영화는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페허만 남아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대변해주고 있다.
담장 안에 들어서면 50m쯤 떨어진 곳에 사원의 입구가 있고, 출입하는 세 개의 성문이 있는데, 중앙의 문은 왕이나 고승, 양쪽의 문은 일반인과 스님들이 출입하는 문이라고 한다.
사원의 주변에는 별도의 도시를 건설하였고, 성안에는 마을이 있었다. 사원의 성문을 들어서니 석문들이 점점 작아지는데 그 이유는 고개를 숙이고 경건한 마음으로 신성한 사원을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이사원은 온통 거대한 스펑나무 뿌리가 괴물처럼 사원을 휘감고 망가트리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나무에도 천적이 있는지 생명력이 강하고 뿌리가 강한 스펑나무를 휘감아서 죽이는 일명, 기생나무가 있었다.
기생나무에 둘러쌓인 스펑나무는 고사하여 속이 텅 비어서 그 끈질긴 생명력의 나무도 몰골이 말이 아니다. 특이한 것은 이 사원은 복원을 중지하고 원형 그대로 보존키로 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스펑나무들이 자야바르만 7세가 지은 유적에서만 자라나 그 사원의 건물들을 파괴한다고 한다. 오전 답사를 마치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앙코르 왓 답사를 시작하였다.


앙코르 왓(Angkor Wat)


Angkor는 “도읍”이란 뜻이고 Wat은 “사원”이란 뜻으로 Angkor Wat은 “사원의 도읍”이란 뜻이다.
앙코르 왓은 단일 건축물로는 세계 최대 규모로 크메르 제국의 수리아바르만 2세(1112 ~ 1152)가 12세기 전반에 30년에 걸쳐 완성한 힌두교사원으로, 가로 1.5Km, 세로 1.3Km, 높이 65m에 이르는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다.
Angkor Wat가 세계 7대 불가사의중 하나로 꼽히는 것은, 거대한 규모와 돌마다 새겨진 정교한 조각 솜씨 때문이다. 당시의 종교는 힌두교로서 비슈누를 숭상하고 있었습니다.
Angkor Wat의 구조는 힌두교의 우주관에 입각한 우주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중앙의 높은 탑은 우주의 중심인 메루산의 정상이며 주위의 5개의 탑은 주변의 5개 봉우리를 의미한다. 외벽은 세상 끝에 둘러서 있는 산들을 의미하며, 해자는 바다를 의미 한다. 해자는 넓이 260m에 길이는 5.5Km로, 당시에는 악어를 키웠다고 한다.
Angkor Wat은 Angkor 유적지 중 가장 웅대한 규모의 건축물이고, 가장 잘 보존된 건축물이다. 이 사원의 구성, 균형, 설계, 조각과 부조의 완벽함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면으로 부터 크게 3개의 층을 이루고 있으며. 3층의 단에는 왕과 승려들만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5개의 탑이 서 있다.
40계단으로 구성된 12쌍의 층계가 각 면의 중앙과 가장자리에 2개씩 위치하여 3층 단으로 오르게 되는데, 그 경사가 70도로 매우 가파르다. 중앙의 신전은 3층 바닥부터 42m의 높이로 솟아 있고 1층의 단을 둘러싼 부조 회랑은 총 1,200㎦ 나 되며 부조의 주제는 인도의 전설과 경전 그리고 Angkor전승기록 등을 조각해 놓았다.3층으로 올라가니 거대한 중앙탑과 가파른 계단이 눈에 들어온다.
정면의 계단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오르니 숨이 차다. 중앙 탑 맨 위까지는 65m이고, 이곳 3층까지는 52m라고 한다. 와불이 두 군데 있어 경건한 마음으로 두손을 모아서 기도해본다.
내려가는 것이 걱정되었으나, 다행히 북쪽 계단의 끝부분에 철제난간을 설치해 놓아 쉽게 내려올 수 있었다. 철제 난간은 앙리무어가 자기부인이 계단에서 미끄러져 사망했기 때문에 설치했다고 한다. 노약자들은 무척 고생을 하니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안 올라가는 것이 안전하다.
앙코르 왓을 답사하는데 만 약 3시간이 소요되었다. 17:30 앙코르 왓 정문을 나와 얼마 않되는 곳의 프놈바켕 언덕 같은 산으로 올라가서 18;00 인공저수지로 떨어지는 일몰을 감상하였다. 이곳에는 코끼리를 타는 관광객들이 많이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캄보디아 민속춤을 재미있게 관람하고 호텔에 투숙하였다.


2월5일 (3일)
톤레삽(Tonle Sap) 호수 및 수상 촌


오전 8시30분 씨엠립에서 12km쯤 떨어진 톤레삽호수의 수상촌을 답사하기 위하여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참을 가다 비포장도로를 들어서 15분쯤 달리니 배 타는 곳에 도착하였다. 모든 상가가 도로를 향하여 건축되어 있고, 캄보디아 사람들은 문맹률이 높아서 이발소, 미용실, 학교 등을 그림으로 표시해 놓았다.
배가 그려진 곳은 나루터이며, 이곳에서 수로를 따라 나룻배를 타고 가면 프놈펜까지 이어진다. 주택의 1층이 빈공간인데 이는 지열, 해충, 뱀, 침수방지를 위해서 지었고, 건기와 우기의 수로를 따라서 이동하기 쉽게 건축되었다.
톤레삽 호수는 한국의 경상남도 넓이인데, 우기 때면 메콩강이 넘쳐흘러 호수가 3배로 커진다고 한다. 건기때 물이 빠지면 벼농사를 짓는다. 수상촌(水上村)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프놈펜까지 배를 타고 5시간이 소요되며, 이 호수에 고기가 너무 많아서 새우고기를 잡아 말리는 곳을 많이 볼 수 가 있었다. 수상촌에는 베트남사람들도 국경에 관계없이 경찰서에 신고만하면 마음대로 살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건기때는 물이 말라서 30분쯤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10명씩 태울 수 있는 배를 타고 수상촌의 호수를 관광하였다. 호수의 좌우에는 수상가옥이 즐비하다. 수상가옥은 대나무를 엮어서 그 위에 집을 지었고 부력으로 집이 물위에 항상 떠 있다.
이곳 사람들의 얼굴이 전혀 걱정이 없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이동식 상점도 있고, 주유소도 있다. 수상관광의 배를 조종하는 사람은 17-18세, 심부름하는 아이는 12-13세쯤 되는 소년이었다.
호수를 한바퀴 돌아오는데 40-50분이 소요되는데, 호수 중간쯤에 휴게소가 있었다. 이곳에는 '럭'이라는 고기를 양식도하고, 페리칸, 원숭이, 비단구렁이, 거북이도 있고, 공예품과 기념품, 음료수를 팔고 있었는데 우리들은 이 수상 휴게소에서 음료수를 사 먹고 배를 다시 타고 처음 탓 던 지점으로 나와 수상 관광을 마쳤다.

킬링필드(Killing Field) 추모탑

1988년에 건립한 캄보디아 양식의 커다란 추모탑에는 1985년도에 발굴한 8천구의 시체를 성별,
나이별로 구분하여 전시해놓고, 아래 칸에는 해골과 뒤섞여 있던 옷가지를 보관해 놓은 곳이다. 그 옆의 게시판에는 발굴현장의 모습이 사진으로 게재되어 있다.
그 당시에 정치범 학살에 참여했던 크메르루즈군은 14세-16세의 청소년이었으며, 지금도 생존해 있는 사람들도 많고, 희생자는 머리가 벗겨지고 배가 나오고, 안경을 쓴사람, 공무원들이 었다고 한다.
이때문에 지금까지도 캄보디아에서는 썬그라스를 제외하고는 안경을 쓴 사람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크메르루즈군에서 처형을 일삼던 사람들을 동반자로 생각하여 투항을 하면 용서를 하고 같이 살도록 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영화 '킬링필드'이후 킬링필드로 불리고 있으며 주로 수용소에 잇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처형되고 매장되었으며. 전쟁 때문에 희생도 되었지만 기아와 질병 때문에 더 많이 죽었다고 한다. 프놈펜에 잡혀있던 정치범을 1만 2천명 정도를 처형하여 구덩이에 집단 매장했는데, 약 9천명 정도만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개인이 전쟁 때 매설한 각종 지뢰를 전시해 놓은 지뢰전시관을 구경하고 장원이라는 한국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후 시엠립 앙코르 국제공항으로 이동 19:30 호치민으로 출발 20:30 베트남 호치민 탄손누트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NOVOTEL HOTEL에 투숙하였다.

2월6일 (4일)
베트남(Vietam) 호치민(Ho Chi Minh)

08:30 베트남 호치민(구 Saigon) 답사 길에 나섰다.
호치민시는 베트남경제의 심장부로써 인구 540여만의 베트남 상업과 경제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베트남 최대의 도시이자 경제발전의 전진기지이다. 호치민은 수도인 하노이와 더불어 특별시에 해당한다.
1975년 북베트남(월맹)이 월남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남베트남의 수도였으며, 사이공( Saigon)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중국과 프랑스, 미국 등 외세의 끊임없는 개입은 도시의 모습, 경제, 문화에 이르기 까지 독특한 모습을 형성하였으며 베트남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이기도 한 호치민은 1세기에 가까운 프랑스 식민통치 시절에는 프랑스풍의 도시가 건설되어 동양의 파리’라 불리기도 했으며, 미국 지배 시절에는 수도로서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로 역량을 발휘했다.
1975년 월남의 공산화 이후 경제의 침체기를 겪기도 했으나 1986년의 ‘도이모이(쇄신)’정책에 의해 외국에 대한 시장개방의 전초기지가 되면서 현재는 베트남 경제의 중심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 도시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19세기중반 프랑스의 통치 시대부터이다. 그래서인지 시내에는 멋진 콜로니얼의 건물과 교회가 세워졌다. 현재는 월남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 호치민의 이름을 따서 사이공 보다는 호치민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티네운하, 동쪽으로는 사이공강, 남쪽으로는 벤네운하를 끼고 있어 물에 의해 3면이 보호되는 천해의 요새로서 서쪽으로 뻗은 낮은 평야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쌀, 고무이며 시멘트 화학 산업도 발달해 있다. 베트남의 면적은 한반도의 약 1,5배나 되고 인구는 약7천635만 명이라고 한다.

중앙우체국

노틀르담 성당 바로 옆에는 역시 프랑스 통치시대인 1886-1891년 설립된 중앙우체국이 자리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서울 역 기분이드는 건물이다.
정문입구 상부에는 큼지막한 시계가 시간을 알리고 있으며 우편뿐만 아니라 국제전화 ,팩스, 전보 등이 가능하고 공중전화카드나 시내지도도 구입 할 수 있다.

노틀담 성당

노틀담 성당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인 1877-1883년에 건립되었으며 이시기 건축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평가된다. 성당은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담과 닮은꼴인 신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져 있다.
성당 건립에 사용된 빨간 벽돌 등 모든 자재를 프랑스의 마르세이유에서 공수하여 1890년에 완공 되었으며 성당길이는 93m 첨탑의 높이는 40m이며 벽 위의 섬세한 조각이 아름답다.

다이야몬드 프라자

호치민 시내를 버스를 타고 다이야몬드 프라자 빌딩을 보면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한국 포스코개발이 호치민에 건설한 베트남 최초의 철골조 주상복합빌딩이라고 한다. 포스코개발과 베트남 철강총공사(VSC: Vietnam Steel Corporation)가 60:40의 비율로 출자하여 착공(95년 9월 18일) 4년 11개월 만에 준공한 다이아몬드 플라자는 지하 2층, 지상 20층 규모로 상가 사무실 아파트가 하나로 이루어진 베트남 최초의 철골조 빌딩이다.
포스코개발은 이 건물을 40년간(1995~2034) 운영한 후 베트남 철강총공사측에 지분을 무상으로 양도하게 되어있다고 한다. 이어서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독립궁을 차내에서 보고 지나갔다.
미 토(My Tho)
이어서 호찌민시에서 국도 1호선을 타고 남서쪽으로 약 2시간 내려가 메콩텔타 입구의 도시인
미토(My Tho)에 12:30 도착하여 월남 쌈과 생선 요리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미토는 망고· 랑브탄 등 풍부한 과일의 산지로도 유명하다. 미토 관광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메콩강 크루즈다.
작은 모터가 달린 나무배를 타고 타이손 섬을 향해 출발한다. 양쪽으로 펼쳐지는 정글을 바라보면서 황토색의 메콩강의 웅대한 흐름 속으로 들어간다. 이따금 스쳐 지나가는 벤쩨행 페리,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는 어부들도 눈에 보였다.
메콩 강의 수심은 11m -14m 정도라고 한다. 바다를 연상시키듯 거대하고 웅장한 메콩 강에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배들이 떠 있다. 캄보디아를 오가는 여객선과 화물선, 고기잡이 배, 관광용 모터보트들로 강은 언제나 활기차다.
4개의 삼각주 섬이 있는데 우리들은 유니콘 섬을 향해 출발하였다. 거북섬을 돌아서 다시 20분쯤 가서 배에서 내려 과일 농장을 견학하였다. 이곳에서 벌꿀차와 빠빠야, 망고 등의 열대과일 시식을 하였다.
수공업 형태의 코코넛 사탕 공장 코코넛 열매를 채취하여 화로에 끓이고 사탕을 포장하는 과정까지 직접 시연하며, 시식도하고 사탕을 조금씩 구매하였다. 다음 코스는 4사람씩 월남 삿갓 모자를 쓰고 카누를 타고 밀림 농장으로 들어가는데 코코넛 나무가 울창한 열대 우림의 정취를 맘껏 느낄 수 가 있었다.
내리면서 카누를 젖는 할머니에게 1불 팁을 주고 내렸다. 약 3시간 동안 유니콘섬 관광을 마치고 다시 배를 타고 선착장으로 나와 호치민으로 출발하였다. 호치민으로 들어오면서 버스를 탄체 오페라하우스 동물원 해군기지창 남부 베트남에서 제일 화려한 거리인 프랑스식인 혁명의 거리를 지나면서 설명을 들었다.

벵에 선상디너 및 사이공 야경관광

20:00 유람선에 승선하여 1시간동안 식사를 하면서 쇼를 관람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사이공 야경을 즐겁게 감상하였다. 3층 유람선이 몇 척 있는데 휘양 찬란한 네온 싸인 불빛이 사이공 강물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고 30도의 날씨인데도 시원하였다.
이상으로 여행일정을 모두 마치고 10:30 호치민 탄손누트 국제공항으로 이동 책킹 01:10 베트남항공 938편에 탑승 2월7일 08:10 인천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