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산행기(북한산성계곡,용암문,산성주능선,동장대,대동문)
2022, 3, 15.10시30분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에 도착 산행을 시작, 서암사 - 북한산성계곡 - 법용사 - 중성문 - 노적사 - 산영루 - 중흥사지 - 태고사 - 용암문 - 북한산대피소 - 북한산성주능선 - 동장대 - 대동문 - 행궁지 - 중흥사지 - 중성문 -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로 3시30분 하산하였다. 산행거리는 약 10 km, 산행시간은 5시간 소요되었다.
서암사(西巖寺)는조선 숙종 37년 (1711년)에 북한산성 축성이후 한양북쪽 수구문 일대 산성의 수비를 위해 13개 사찰들 중 하나로 규모는 133칸으로 팔도 도총섭 승려(광헌)가 창건하였다. 서암사는 승려들이 수행하며 훈련을 하던 호국승병사찰이었지만 혼돈기인 19세기말 을축년(1925년 7월) 대홍수로 매몰되었다. 고려 충숙왕때 첨의 정승을 지냈던 문인공 민지 (1248~1326년)의 유지가 있던 곳에 창건되어 민지사라 불리 웠으나 후, 사명을 서쪽에 있다하여 서암사라 부르게 되었다.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2006년부터 현 서암사 주지 혜안스님이 발굴 및 복원사업을 진행 중이다.
중성문(中城門) 은 대서문이 적에 의해 뚫릴 것을 대비해 만들었는데 북한산성을 축성한 다음 해인 숙종 38년(1712년), 북한산성의 수비 보완 대책의 일환으로 성 안에 성을 겹쳐 축조한 문이다.
노적사(露積寺)는 조선 숙종 38년(1712년) 때에 북한산성축성 이후 산성의 수비를 위해 창건된 13개 사찰들 중 하나인 진국사이다. 진국사는 노적봉 아래에 85칸으로 승려 성능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중성문 안에 있으며, 돌사자상이 유물로 전해지고 있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나 1960년에 중건하면서 사찰의 이름을 노적사로 변경하였다.
산영루(山映樓)는 북한산성 내에 위치했던 누각으로 조선후기에 설치된 중앙 군영인 총융청에서 관리를 담당했던 중요한 건물이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이나 추사 김정희(1786-1856) 등 당대 많은 지식인 등이 이곳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시문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1925년 대홍수로 유실되면서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으나, 2015년 고양시의 역사문화복원사업을 통해 산영루를 복원하였다.
북한산중흥사지(北漢山重興寺址)는 북한산성 내 장군봉과 구암봉 사이에 있는 옛 절터이다. 1992년 12월 31일 경기도 기념물 제136호로 지정되었다. 중흥사는 북한산성 내의 승영 사찰(사찰 11곳, 암자 2곳)과 승병 350여 명을 관리하고 지휘하던 승군 사령부가 있던 사찰이다. 북한산성 내에는 11개 사찰에 승군이 주둔했는데, 승군의 총 지휘자인 도총섭이 중흥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후 폐허 상태였다가 2012년 대웅전과 요사채를 복원하였다.
태고사(太古寺)는 북한산성 안에 위치하는 절이다. 고려시대 말 공민왕때 원증국사(圓證國師) 보우(普愚)에 의해 창건되었던 것이 고려 멸망 이후 거의 폐허가 되었는데, 조선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축성 이후 산성의 수비를 위해 승려 성능(聖能)이 131칸의 규모로 중창했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나 다시 중건되었다. 현재 태고사에는 지정문화재로 보우의 행적을 기록한 원증국사탑비와 그의 사리탑인 원증국사탑이 있다.
태고사원증국사탑(太古寺圓證國師塔)은 고려 말의 승려인 원증국사 보우(普遇, 1301~1382)의 사리탑이다. 태고사 북쪽 봉우리 중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굴로 인해 쓰러져 있었는데 1980년 10월에 복원하였다. 부도는 2단의 널찍한 축단 중앙에 건조되어 있으며 탑신은 전체적으로 원형이지만 상부는 매우 좁은 편이다. 하대석은 방형으로 각 면에는 3구씩의 장방형 액을 새겼으며, 상면에는 연화문을 받침대를 조성하였다. 8각의 옥개석은 모서리의 전각마다 귀꽃이 장식되어 있는데, 그 사이에는 장막을 돌린 시문(施文)이 고려 시대 특유의 수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고려 시대 후기의 솜씨를 보여준다. 최근 비슷한 형식의 부도탑을 그 앞에 세워놓았다. 1983년 12월 27일 보물 제749호로 지정되었다.
태고사원증국사탑비(太古寺圓證國師塔碑)는 고려 말의 승려인 원증국사 보우의 부도탑비로서 대사의 출생부터 입적에 이르기까지의 내력을 적은 것이다. 비각은 돌기둥만 남아있던 것을 1979년에 복원해서 현재 법당 우측에 목조와 화강암의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보물 제611호로 지정되었다.
용암문(龍巖門)은 북한산성에 있는 암문으로, 원래 이름은 용암암문(龍巖暗門)이었다. 조선시대 단위로 규모는 높이 6척 5푼, 너비 7척 5푼이다.
동장대(東將臺)는 부한산성 동쪽에 위치한 장대이며, 북한산성 3개의 장대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이기도 하다.조선시대에는 금우영의 장수가 주둔했다. 용암문에서 직선거리로 650m 떨어져 있으며, 해발고도는 586.0m이다. 1996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 복원하였다.
대동문(大東門)은 북한산성의 문으로, 초기의 이름은 소동문(小東門)이었다. 규모는 조선시대 단위로 높이 9척, 너비 10척이다. 현재의 문루는 1993년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된 것이다.
북한산 행궁지 (行宮址)은 숙종 37년인 1711년부터 2년간 지어진 것으로, 임금이 사용하는 외전과 왕비가 사용하는 내전으로 이뤄져 있으며 전체 규모가 4천여 평, 124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행궁은 임금이 궁을 떠날 때 임시로 머물 수 있도록 지어진 건물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등으로 훼손돼 지금은 건물터와 축대 일부, 담 터, 우물 자리, 돌계단 등이 남아 있다. 고양시에서는 북한산행궁지(.경기도기념물 제160호)를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